[지역연구-순천 중앙동편(1)] 중앙동, 땅이름의 변천에 얽힌 역사 "중앙동은 본래 순천군 소안면 지역으로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소안면의 동내리와 동외리 일부를 병합 대수정이라 하고, 소안면의 남내리와 동외리 일부를 병합 본정, 소안면의 동외리, 우명리 각 일부를 병합 동외리라 하여 각각 순천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11월 1일 대수정, 본정, 동외리는 순천읍에 속했으며,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 시행에 따라 순천부가 순천시로 바뀌고 동제 실시에 따라 중앙동, 남내동, 동외동으로 운영하다가 1964년 1월 7일 순천시의 33개동을 16개 행정운영동으로 조정하면서 중앙동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순천시청 홈페이지)
이것은 순천시 중앙동의 지명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현재 시점의 글이다. 이것을 좀 더 이야기로 풀어내 볼까 한다. 중앙동, 여러 도시에 ‘중앙동’이 있다. 중앙동은 특히 상업시설이 밀집한 도심의 중심부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이 지역은 상가가 발달해 있고 유동 인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순천시 중앙동은 순천 원도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그 중심이 이동했거나 다원화되었지만, 여전히 중앙동인 것이다. 현재의 중앙동을 ‘원중앙동’이나 ‘구중앙동’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행정적 관습 또는 관례라 할 수 있겠으나, ‘중앙’이라는 말이 지닌 상징적 위상을 그대로 고수하고 싶은 주민들의 심리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중앙동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자존심이 걸린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런 면에서 순천의 자존심은 중앙동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거의 영화를 부활시키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위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중앙동’이라는 지명은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바꾸면서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대수정(大手町, 오테마치)’이 오늘의 중앙동이 되었다. 순천 행동과 영동은 일본식 정(町)을 동(洞)으로 바꾸었을 뿐 이름은 그대로 사용한 경우이다. 나머지 지역은 리(里)가 동으로 바뀌었다. 대수정이 이전의 ‘동내리’와 ‘동외리’ 일부를 병합했다고 한 것은 과거 순천부읍성의 성벽을 기준으로 성안과 성밖이라는 구분이 있었고, 성안은 다시 동서남북 네 개의 문으로서 동내리, 북내리, 서내리, 남내리의 네 구역으로 나뉘었다. 법정동인 중앙동, 남내동, 동외동 세 동명의 변화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참조 지도1) (1) 소안면 동내리와 동외리 일부→대수정→중앙동 (2) 소안면 남내리와 동외리 일부→본정→남내동 (3) 소안면 동외리와 우명리 일부→동외리→동외동
[지도1] 1915년 일제강점기 순천군 지적도 일부
객사가 있었던 곳, 중앙동 ‘큰 손’으로 풀이되는 대수(大手)는 어떤 의미를 지닌 지명일까? 큰 손으로 치자면 부처님 손바닥만 한 것이 없는데, 일본인들이 보기에 순천에서 부처님 손바닥이 지금의 중앙동이었을까? ‘황금’이라는 말도 그렇거니와, 금부처의 손바닥, 그것이 대수정이 가진 의미일지도 모른다. 일본어 오테(大手, おおて)는 성(成)의 정면 또는 정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성의 정문이란 곧 성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관문을 말한다. 예부터 순천읍성의 정문은 일반적으로 남문으로 여겨졌다. 진남(鎭南)의 의미도 있거니와 옥천변에 자리 잡은 남문의 누각인 연자루(燕子樓)가 그 이름처럼 ‘소강남(小江南)’ 순천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생각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은 그들의 깃발처럼 해가 뜨는 동쪽을 숭상하였고, 아마도 과거 정유재란 당시 군대를 이끌고 순천을 진입한 첫 문이 동문이었을 것이기에 동문을 순천성의 정문으로 인식했던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동문은 조선왕의 위패를 모신 객사(客舍)와 가까웠다. 때문에 대수정이라는 지명이 동문과 객사라는 두 개의 상징적 건축물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대수정은 또한, 일종의 황금을 낳는 핵심 상권 지역으로서 대수정 권역을 일본인들의 본거지인 본정(本町)-남내동에서 뻗어 나온 부처의 팔과 손바닥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순천부읍성의 동문은 임금의 명을 받고 순천부사로 부임해온 지방관이 들어오고 나가는 관문이었다. 지역민들은 그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장소였다. 순천에서 한양(서울)으로 가는 큰길은 북문이 아닌 동문에서 시작되었다. 여수와 광양으로 가는 길 또한 동문을 통해서였다. 순천을 거쳐 간 수많은 역대 지방관들의 모습이 동문길과 동문 밖에서 어른거린다. 고려조 팔마비의 주인공 최석 부사도, 조선조 순천에서 승평세상을 꿈꿨던 지봉 이수광도 동문으로 들어와 동문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순천은 어떤 첫인상과 소회를 남겼을까? 이처럼 동문은 순천부읍성의 네 문 가운데 남문만큼 중요했고 만감이 교차했을 문이었다. 그런 동문이 1909년 무렵 도로를 개설한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헐렸다. 그리고 잊혀졌다. 만약 중앙동의 역사적 경관의 재생이 필요하다면 객사와 동문을 어떻게 기억하고 다시 기록할지 생각해볼 일이다. 부연하자면, 동문을 관통하는 길을 현재 남문 연자루의 이름을 빌려 ‘연자로’로 부르고 있는데 ‘동문로’로 명명해야 맞다. 중앙시장과 남내동 남내동은 ‘남문안’으로 불렀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본정(本町)으로 바뀌었다. 마치 본향(本鄕)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 이름처럼 순천 지역에 이주해온 일본인이 일찍부터 자리 잡은 지역이다. 본정은 일본어로 ‘혼마치’라 부른다. 순천부읍성의 성벽 가운데 가장 먼저 헐린 구간이 남내의 성벽으로 남문과 동문 사이 구간이다. 광주와 연결되는 신작로를 개설하기 위해 북문 옆 성벽 일부분을 헐었던 것과 비교하자면 남내 지역에서는 긴 성벽 전체를 무너뜨렸다. 성벽이 사라진 자리는 도로가 되었고 그 주변으로 상가와 주택이 들어섰다. 그중 남문 옥천변이 현재의 중앙시장길이 되었다. 원래 장은 부내장(府內場)이라 하여 남문과 동문거리를 중심으로 5일장이 섰다. [도판1]과 같이 장날이면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시내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제는 20년대 중후반에 도심 혼잡을 이유로 성 안에 열렸던 장을 성 밖으로 옮겼는데, 그것이 지금의 북북시장(웃장)이 되었고 일부 어시장이 남아 현 중앙시장이 된 것이다. 중앙시장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일본인 거류지가 남내에 주로 형성되었으므로, 일본인의 편의를 고려하였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조선인이 장악했던 시내 점포는 서서히 일본인 사장으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본정의 상권은 점차 대수정으로 확대되었다. 너른 객사 터를 수용한 후 대지를 잘게 나누어 민간에 분양했다. 아이들을 가르쳤던 학교로 사용했던 객사는 그렇게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인들은 치안을 이유로 조선인 거주지와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어 갔다. 순천에서 일본인들은 동문 근처 경찰서와 중앙시장이 가깝고 성벽을 헐어버린 이후로 비교적 국유지 또는 공지가 많았던 남내와 성동 지역에 밀집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 성동초등학교 역시 일본인 자녀 교육을 위한 소학교로 기존 영동에서 1932년 무렵에 현재의 동외 지역으로 교사를 새로 지어 옮겼던 것이나, 동문 밖 동천 변에 자리 잡고 있던 환선정 호수를 메워 시민 공원으로 만들려고 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 지역 일대가 일본인의 본 주거지였고, 점점 일본인에 의한, 그들을 위한 개발이 활발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도판1] 1910~1920년대 초반 추정. 순천부내장 장날 풍경. 미국선교사가 남문 연자루 위에 올라 촬영한 것으로 현 중앙로의 모습이다. 멀리 북쪽으로 객사의 웅장한 팔작지붕과 우측 뒤로 삼산의 일부가 보인다. 동문 밖 동외동 ‘동외’는 ‘동문 밖’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는 동문을 기준으로 ‘동문안(동내리)’과 ‘동밖에(동외리)’로 불렀다. 그밖에 1872년 고종 9년에 제작된 순천 지도에서는 동외 지역에 ‘사정(射丁)’과 ‘사마(司馬)’라는 두 지명과 함께 신선을 부르는 곳이었던 환선정(喚仙亭)이라는 호수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다룰 것이다. 동외동 일부분이 된 우명리는 현 매곡동 우명마을의 옛 지명으로 그 일부가 동외동에 포함된 듯하다. 과거부터 ‘성안’과 ‘성밖’이라는 두 개의 지역 구분이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었다. 한양에서도 사대문 안과 밖이 구별되었다. 다만 이 구분이 다소 차별로 나타나기도 했던 모양이다. 성밖을 성저(城底-성벽 아래) 또는 교외(郊外)라 하여 낮춰 부르거나 관심 밖으로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성이 아닌 지방 읍성의 규모로 볼 때, 성안은 주로 관청이 핵심을 차지하였고 민가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민가와 촌락의 백성들이 성밖에서 살았다. 그뿐만 아니라 유교의 정신적 성전이라 할 수 있는 문묘인 향교, 사직단(社稷壇), 여단(厲壇), 성황단(城隍壇)과 같은 상징적 제사 시설이 성밖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성안만 보아서는 과거의 전통도시인 읍성의 구조나 옛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밖을 성안과 함께 제대로 살펴야 비로소 원도심의 공간적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중앙동의 동외 지역이 그렇다. 우리는 동외동의 역사적 장소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다음 이야기는 성의 동쪽, 동문 밖을 일컫는 ‘동외’라는 곳으로 이어진다. (글_이명훈. 202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