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연구] 순천
시네마 조곡
비 내리는 영화 촬영장
학교에 다니기 전, 어린 나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 중 하나가 마을 김부자 집 앞에서 영화를 촬영하던 모습이다. 영화가 뭔지도 모를 나이였지만, 이색적인 구경거리에 동네 아이들이 떼로 모여들어 촬영장 한 편에 진을 쳤다. 영화를 촬영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TV로만 보았던 배우도 그때 처음 보았다. 그중에서 당시 인기 TV 드라마였던 <수사반장>에 출연하고 있었던 배우 ‘김상순’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 내가 그 배우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후에 보태어진 기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둑실마을에서 내가 보았던 배우 김상순은 그렇게 나에게 특별하게 기억되었다. 김부자 집 촬영장은 내내 어수선했다. 분주하게 어른들이 오고 갈 뿐, 뭔가 ‘굉장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급격하게 호기심이 사라졌고 평상시처럼 요란을 피우며 인근에서 그들만의 놀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쏴~아!’ 물이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촬영장에 미리 와있던 소방차 한 대가 공중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소방차가 불 끄는데 사용되는 것 말고, 그렇게 영화에서 비 내리는 장면을 연출할 때 사용될 줄이야. 촬영장은 다시금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와! 와!’ 마을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촬영 준비가 되었던지, 어수선했던 촬영장에 긴장감이 돌았다. 이어 배우 김상순과 상대 배우가 비를 맞으며 연기했다. 연기가 끝나자 소방차의 ‘물 쇼’도 끝났다. 소방차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자 다시 촬영장은 어수선해 졌다. 몇 장면의 기억이 더 있을 것인데, 드러난 나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아마도 소방차의 ‘물 쇼’와 배우 김상순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강해 다른 기억을 가리고 있을 것이다. 김부자 집
순천은 예부터 전남 동부권의 중심지였고, 물산이 풍부했는데 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고문헌에 순천 고을 풍속에 대해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라는 기록이 있고,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토지조사에서도 땅 부자들이 제법 많다는 통계나 “순천에서 옷 잘 입는 체하지 마라”는 이야기도 이 지역에 부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해준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조곡 둑실마을에 터 잡은 광산김씨 일가-김부자도 그런 순천 부자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김부자가 소유한 땅이 꽤 넓었는데, 알려진 것만 해도 마을 뒷산 양박등(‘양복등’이라고도 부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촬영지이기도 했다.)에 광산김씨의 가문의 큰 묘가 두 개 있고, 앞산 죽도봉도 김부자가 소유한 산이었다는 말도 들었고, 마을 앞 당산나무 주위 넓은 들도 김부자의 땅이었다. 마을 곳곳이 김부자 집의 소유였다. 그런 김부자 집은 그 모양새나 규모에서도 부잣집다운 면모를 자랑한다. 돌계단이 있는 솟을대문에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와 곡간을 비롯해 주위에 그 일가친척이 사는 몇 채의 기와집이 더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둑실마을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변두리 ‘부락’ 정도로 평가절하되었다는 점이다. 동천을 경계로 도심과 가까운 둑실마을은 김부자 집이 있는 둑실을 중심으로 우측 동네를 ‘희재’로, 좌측 죽도봉 공원 입구 쪽 마을을 ‘안골’로 이름하는데, 동천과 들녘을 앞에 두고 봉화산을 등지고 형성된 배산임수의 전통적인 농촌 마을의 분위기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도시화의 영향인지, 언제부터인가 단순 노동자나 상인들이 비교적 세가 저렴했던 도심 가까운 변두리로 모여들어 살기 시작해 도시 변두리 달동네의 분위기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중앙동 시내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동편 봉화산 아래 둑실마을이 그저 동천 건너 못사는 동네 정도로 보였나 보다. 그런 상대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내가 지금까지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인식이 ‘차별’이었다는 점이다. 성 밖 동쪽 마을의 아이들
위치상 둑실마을의 아이들은 동천 다리를 건너 성동초등학교부터 다니게 되는데, 성동학교가 어떤 곳인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공립학교이고, 소위 중앙동이나 장천동에 거주하고 있던 관료나 전문직, 또는 상인 가운데 잘사는 집의 (조선) 아이들도 섞여 다녔던 학교이다. 교사들은 노골적으로 잘사는 동네와 못사는 동네, 잘사는 집 아이와 못 사는 집 아이를 구별하였고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차별하였다. 이런 선생들의 차별적 시선이나 대우는 종종 아이들끼리의 싸움으로도 번지기도 했다. 그 당시의 학교가 그랬으니 마을에서 뒤엉켜 뛰어놀면서 티격태격 본능에 충실해 싸우며 커갔던 것보다 못했다.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마을의 동무들과 멀어지는 것, 마을의 구석구석, 마을의 냄새와 소리, 마을의 어른이나 공동체의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었던 것은 단순히 전쟁 같은 입시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인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부당한 차별을 내면화하면서 나 자신의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학교 교육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입시 위주의 교육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차별’을 교육으로부터 ‘상식(일반의 가치관)’처럼 내면화하게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사이좋게 지내라.”라는 말이 그저 말에 불과했던 것일까? 시내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또한 받았던 문화적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지만, 그 충격이란 게 결국 상대적 빈곤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문화적 열등감이 되어 버렸던 것은 아닌지 종종 의심할 때가 있다. 현재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으니, 문화적 자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확하지만, 과연 그것의 쓰임이 한국문화나 일상의 문화에 잘 축적되고 잘 쓰이고 있는지도 늘 의심스럽다.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배웠다는지, 오히려 가난하지만 행복하다든지, 우정을 쌓으며 성장했다든지, 상대의 깊은 배려심에 대해 감사를 한다든지 그런 문화적 자본은 우리에게 과연 얼마나 있는 것인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78년 둑실마을 김부자 집에서 찍은 영화, 내가 그 촬영 현장을 지켜보았던 영화가 조문진 감독이 연출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제목의 영화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 영화는 주요섭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1961년에 신상옥 감독이 흑백영화로 먼저 제작해 흥행을 거둔 바 있고, 한국영화 고전의 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아 지금에도 ‘온전히’ 신상옥 감독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신 감독의 동명의 영화가 온전한 것에 비하면 조문진 감독의 1978년 버전의 영화는 온전하지 못하다. 그 말은 조문진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이 영화는 당시 외화에 밀려 개봉관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흥행에도 실패해 잊힌 영화가 되어 있었다. 과연 이 영화가 순천의 극장에서 개봉되었는지도 불확실하다. 나는 그 영화를 80년대, 언제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극장이 아닌 TV에서 딱 한 번 어렴풋이 본 기억이 있다. 아마 둑실마을 김부자 집에서 촬영했던 그 영화였던 것도 몰랐을 것이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그 이후에도 <TV문학관>과 같은 방송드라마나 다른 버전으로 제작되기도 했고, 어린 딸 ‘옥희’라는 캐릭터를 통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당시 ‘옥희’는 분명 내 또래의 아이였는데, 만약 지금의 그녀가 당시 영화 촬영장이었던 둑실마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잊고 있었던 이 영화에 대한 나의 기억은 2012년 한 실험영화 작가 겸 프로그래머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2013년 이른바 순천영화 연구 <시네마 무진>이라는 기획으로 재생된다. 지역의 극장이라는 공간에 관심이 있었던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순천에서 촬영된 영화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고, 나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 영화가 기록하고 있는 약 35년 전의 순천, 그리고 둑실마을의 모습이 궁금했다. 내가 목격했던 소방차 ‘물 쇼’의 촬영이 영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도 몹시 궁금했다. 다시 영화를 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인터넷 검색과 수소문 끝에 이 영화의 상영 가능한 필름이 한국영화자료원에 ‘일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디지털화도 되어 있지 않았고 비디오테이프로도 제작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대여해서 볼 수 있는 16mm 필름도 영화 전체 분량이 온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뒷부분의 필름이 손상되어 상영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어떻게 끝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물론 전체 줄거리는 아는 것이지만 감독이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는 볼 수 있는 분량이라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필름을 대여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둑실마을 사람들과 함께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마을 주민 상영회를 계획했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를 연출했던 조문진 감독을 상영회에 초청하기로 했다. 2013년 7월 24일 오후 7시, 원조곡경로당 2층에서 마을 주민과 영화감독이 만난 자리에서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그렇게 상영되었다. 16mm 영사기가 ‘좌르르~’ 소리를 내더니 영사기의 작은 구멍을 통해 잠자던 영화는 빠져나와 백색 스크린에 도달되었다. 영화에 대한 기억은 비로소 우리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2020.글_이명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