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연구] 순천
중앙동도큐멘타를 위한 노트
중앙이 어디지?
중앙동, 여러 도시에 ‘중앙동’이 있다. 동서남북 방위로 지명을 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중앙동은 그 방위 관념의 기준점이 된다. 중앙, 즉 사방의 중심은 관습적으로 최고 권력자가 위치한 곳으로 정하는데, 일테면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머무는 한양이 중심이 된다. 21세기 현재에도 서울이 중앙이라는 관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반면 지방의 경우에는 관청이 있는 곳을 관습적으로 중앙으로 정한다. 임금의 위패를 모신 객사와 임금의 명을 받아 부임한 지방관이 사무를 보는 동헌이 지방의 핵심 관청이다. 중앙과 대비되는 지방이라는 관념은 한양-서울을 제외한 주변부이고 그 거리를 따져 변방 또는 지방이 된다. 지역은 이런 방식으로 다시 중심을 임의로 설정하고 그 주변을 규정하는데, 지방 관청을 중앙으로 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또한 관습을 따른 결과이다. 옛 지도를 살펴보면 대개 객사와 동헌이 있는 관아를 지도 중심부에 크게 그려놓고 동서남북 사방을 표시하고 있다. 성안과 성밖
순천(당시 순천군)은 1910년 이전까지 낙안읍성(1908년 폐군, 일부가 순천으로 병합)처럼 성곽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연자루가 순천읍성의 남문 누각이었다는 것을 원도심 순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순천읍성은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이 갖추고 있었는데, 성곽을 경계로 성안과 성밖으로 구분하였다. 다만 지방의 모든 곳이 성곽을 갖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성 안밖의 구분이 모든 지역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안은 다시 북내와 동내, 남내와 같이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였고, 성밖은 북정과 남정, 동외와 같이 방위로 구분하여 불렀다. 주변 하천이나 산도 방위로써 그 이름을 정한 경우도 흔한데, 순천의 옛 기록에 의하면 옥천을 서계(西溪), 동천을 동계(東溪)로 부르기도 했다. 죽도봉은 순천읍성의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십이지에서 동쪽을 표상하는 묘(卯)자를 써서 ‘묘산도(卯山島)’으로도 표기한 기록이 있어 참고할만하다. 그리고 조선시대 지명에서 중앙동을 포함한 원도심 지역을 ‘소안(쏘안)’으로 불렀는데, 그것은 동외 동천 변, 환선정 호수의 안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일 것으로 추측한다. 동외 환선정과 남문 연자루는 오랫동안 순천을 대표했던 누정(樓亭)으로 1962년 대홍수로 사라졌던 것을 80년대 후반 죽도봉에 다시 세워놓았다. 두 누정은 도로명으로도 남아있는데, 연자로와 환선로가 그것이다. 대수정과 본정
오늘의 중앙동은 이전의 중앙, 남내, 동외 3개 동 지역을 합친 구역이 되었지만, 지금의 연자로를 경계로 북쪽 중앙동과 남쪽 남내동과 동쪽 동외동 일부 지역에 상권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순천 사람들은 이 두 구역을 ‘시내’라고 불렀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일제강점기에 중앙동은 대수정(大手町, 오테마치), 남내동은 본정(本町, 혼마치)으로 불렀다는 사실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본어 오테(大手,おおて)는 성(成)의 정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인들에게 순천부읍성의 객사로 바로 통하는 동문을 성의 정문과 중심부로 파악하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일제강점기 지명 ‘대수정(大手町)’이 해방 이후 ‘중앙동’으로 바뀐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대수정과 본정이라는 지명을 통해 일본인이 순천에서 어디서 어떻게 자리 잡고 살았는지, 중심 상권을 형성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인들에 의해 형성된 상권은 해방 이후에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인 자녀들의 초등교육을 위해 설립된 (심상고등)소학교가 영동에서 지금의 성동으로 옮겨진 점도 일본인의 생활 거점이 남내와 동외(성동) 지역에 집중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보다 구체화시킨다.
동천 변 환선정
1962년 수해로 사라질 때까지, 동외에 자리 잡고 있었던 환선정은 16세기에 세워진 정자로 활터이면서 말타기와 무예를 연마하고, 시를 짓기도 하고, VIP를 접대하는 연회가 성대하게 베풀어진 장소이기도 했다. 연꽃이 피어나면 그 향기가 그윽했던 큰 연못이 있었는데, 중앙에는 ‘우선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작은 배를 타고 오고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자연 호수라기보다는 동천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 호수공원에 가깝다. 지금으로 치자면 ‘순천만 국가정원’이 성의 동쪽, 동외, 동천 변에 조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 이름처럼 ‘신선놀음’하기 딱 좋은 곳이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는 선암사와 송광사가 포교당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해방 직후에는 지금의 동부교회의 전신인 승평교회가 되기도 했으니 유불선과 기독교가 모두 사용한 특이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이곳 연못이 언제 매립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30년대 초 큰 수해를 겪고 나서 동천변으로 제방을 쌓으면서 매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1] 1935년 순천지도 부분 : 경전선과 전라선 철길의 표현이 다른데, 전라선 철길이 건설 중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서 동외동 환선정 일대에 건물이 들어서고 과수원의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환선정 연못이 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환선정은 사찰표시가 되어 있어 선암사의 포교당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2] 1940년 순천동천개수공사계획 평면도 부분 : 1938년 개교한 순천중학교(현 순천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과 전라선이 개통된 것으로 보아, 1937년 무렵의 상황으로 보인다. 1935년 [지도1]와 비교해 볼 때, 동외동과 장천동 일대로 시가가 점차 확장되어가고 조곡교로 연결되는 도로(연자로)와 현 시청 앞으로 도로(장명로)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중앙시장과 북부시장(웃장)
이미 조선시대부터 성안에 시장이 크게 섰는데, 지금의 중앙사거리를 중심으로 남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와 동문으로 이어지는 대로 모두가 장터가 되었다. 장날이 되면 성안은 물건을 사고팔러 모여든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일제강점기에는 광주와 순천간, 순천과 여수, 광양간 자동차 운행을 위해 신작로를 개설한다는 이유로 성문과 성곽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도시 중심부의 혼잡을 줄이기 위해 성안에 섰던 장을 성밖으로 옮길 것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지금의 웃장(북부시장)이 새로 조성되었는데, 거주 일본인들의 편의를 위해 지금의 중앙시장이 (어물전 중심) 상설 시장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 상인들은 점차 시내 중심 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물론 일본인들과 공생하며 이익을 취하거나, 경쟁해야 했던 조선인 상인과 지역 유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일부가 해방 직후 일본인이 운영했던 상점이나 공장, 주택 등의 적산(敵産)을 불하받아 자산을 축적하고 적어도 90년대까지 순천의 중심 상권을 유지한 것도 사실이다.
성동과 성남의 개발
30년대 두 개 철도의 개통은 순천을 교통도시와 교육도시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제공하게 된다. 이후 순천은 기차역이 가까운 성동(동외)과 성남(장천)으로 확장하게 된다. 36년에 오늘날 ‘혁신도시’라 할 수 있는 ‘철도사무소’를 광주와 경쟁한 끝에 순천이 유치함으로써, 순천역과 가까운 조곡동에 철도관사촌이 대규모로 조성되었다. 35년 농림중학(현 순천대학교)에 이어, 38년에는 순천중학(현 순천고등학교)가, 40년에는 공립여학교(현 순천여중‧여고)가 차례로 개교하게 된다. 순천교(1932년, 장대다리)와 조곡교(동천다리)를 놓아 순천역과 동(순천)역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순천의 도시 확장계획은 장천동을 중심으로 한 성남의 개발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계획은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에 물자를 총동원해야 했으므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랬던 것이 해방과 6.25전쟁을 보내고 60년대 들어서 국토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가시화된다. 특히 1962년 8월 대홍수로 순천 곳곳이 물에 잠겨버렸는데, 집을 잃은 수재민을 위해 웃장 북쪽 A지구와 순고 앞 C지구에 새로 주택단지를 조성했던 것이다. C지구의 조성은 아랫장(현 버스터미널 자리) 조성과 함께 순천 남쪽의 개발을 촉진했다. 도시의 북서동쪽 삼면이 산으로 막혀있고 동남쪽이 확 트인 순천은 그 지형상 동남쪽으로 도시가 확장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동은 여전히 중심 상권의 위상을 유지하게 된다. 불어난 순천 인구는 도시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소비거점이 분산되기는커녕 중앙동에 집중되었다. 이런 상황은 90년대 중반 연향 조례지구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대규모 인구가 이동하기까지 지속된다. 중앙동의 상권과 견줄 만하거나 그 이상의 상권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도시의 확장, 순천만과 광양만권의 관계
이처럼 철도의 개설은 도시변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철도는 인근 농촌 지역의 인구를 빠르게 도시로 유입시켰고, 인구의 증가는 도시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1930년 광주와 여수간 철도의 개설은 무엇보다 여수와 벌교를 급성장시켰다. 특히 항구 여수의 성장은 괄목한 것이었다. 1930년 이후 여수와 순천, 벌교를 추가하자면 두 도시, 세 도시 간의 관계는 매우 흥미로운 점이 많다. 여수에서 돈 자랑, 벌교에서 주먹 자랑, 순천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벌교가 시로 승격하지 못하고 중도에 퇴보한 것이 상징적으로 이 세 지역이 공유했던 순천만권의 개발을 늦춘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낙안이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낙안읍성이 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근대식민화의 상징인 철도의 개설과 함께 박정희 시대 공업화의 상징인 공단조성 또한 오늘의 순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약 60년대 말 대규모 공업단지가 광양만권 여천이 아니라 순천만권 그 어디에 들어섰다면 어땠을까? 67년 여천공단의 등장은 광양만을 경제적 측면에서 줄곧 주목하게 했다. 광양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생태적 가치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순천만은 크게 시선을 끌지 못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순천만을 배경으로(광양만의 풍광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쓰였다는 것과 벌교가 꼬막으로 유명해진 것 외에는 달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여천공단은 계속 확장되었다. 80년대 포항제철이 광양에 제철소를 세우기로 하면서, 광양만은 순천만과 전혀 다른 변화의 길로 들어선다. 1989년에 일명 ‘제철 신도시’라 할 수 있는 동광양시가 갑작스럽게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90년대 광양에 인접한 연향, 조례지구 대규모 택지개발 배경에 작용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변화였다. 또한, 중앙동 상권에게도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중심 상권은 여수와 광양이 끌어당기는 곳, 여수와 광양을 끌어당길 수 있는 곳, 바로 지금의 연향, 조례, 왕조 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응답하라 1994 순천과 여수
TV드라마 <응답하라1994>에서 순천과 여수, 두 도시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순천 출신 ‘해태’(배우 손호준)와 여수 출신 여학생 둘 사이에 두 도시의 자존심 대결이 등장한다. 팔도 출신이 모여있는 서울 대학가 술자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대개 이런 상황은 지방을 잘 모르는 서울 출신에 의해 시작되곤 한다. 순천과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을 혼동하거나, 순천향대학이 순천에 있는 대학으로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레퍼토리다. 해태가 “순천이 전남에서 광주 다음으로 큰 도시”라는 말하자 옆자리에 있던 여수 출신 여학생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끼어들면서 급기야 순천과 여수 간 기싸움으로 번진다. 여학생은 (당시) 여수 인구가 18만, 순천 인구는 16만이라는 통계를 제시한다. 살짝 당황한 해태는 질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순천의 자랑거리를 하나둘 짜내듯 제시한다. 교통의 요충지 순천, 소설가 김승옥, 영화배우 박노식, 급기야 “세계 최대 철새도래지” 순천만을 꺼내 든다. 여수 출신 여학생은 하나하나 응수하며 자못 여수가 순천보다 뒤질 것이 없다는 자부심에 넘쳐있다. 김승옥이 순천고 9회 졸업생이라든지, 시내버스 98번을 타면 와온에 갈 수 있다는 깨알 정보는 순천 사람도 몰랐을 것인데, 해태의 자랑질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1994년 무렵에 순천만이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일반에 널리 알려졌었는가는 팩트체크를 해야 할 대목이다. 기싸움에서 해태의 패배(?)가 짙었으나, 그는 잠시 궁리하더니 결정적 히든카드를 꺼낸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이 자존심 대결에서 해태가 꺼낸 최후의 승부수 말이다. 그것은 바로 ‘뉴코아백화점’이었다. 대도시라면 ‘백화점’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더는 반박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순천이 여수보다 큰 도시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 1994년 그 무렵에 순천 뉴코아백화점의 존재가 그렇게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순천 원도심의 랜드마크로 ‘황금백화점’을 이야기하듯, 뉴코아백화점도 90년대 순천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신도심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신도심 뉴코아백화점
뉴코아백화점 순천점은 1992년 조례동에 개점했다.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던 대형백화점으로는 처음으로 호남 지역에 진출한 케이스라 한다. 89년에 착공하여 약 3년간 공사를 거쳐 92년 12월 12일 문을 열었는데, 대지 1천8백평에 면적 6천8백평, 지하 3층 지상 7층 규모로 백화점 외에도 수영장, 볼링장, 헬스장, 공연장, 전시장 등 부대시설을 갖췄다. 앞서 말한 것처럼 순천은 90년대가 시작하면서 신도시 건설에 박차를 기하고 있었다. 인구 30만 규모의 도시를 내다보고 연향, 조례, 왕지 일대를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연향, 조례동 일대는 순천과 광양, 여수 사이에 위치해 그 입지가 좋고 너른 농지였으므로 개발하기 안성맞춤이었다. 뉴코아백화점이 기존 상권이 아니라 조례동 일대가 장차 순천의 신도심이 될 것이고, 아파트 단지에 입주할 중산층을 겨냥하면서, 더 넓게는 여수와 광양까지 상권을 확장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순천 뉴코아백화점의 매출액은 사업초년도에 32억원 정도였던 것이 94년에 836억, 96년에 1,088억원, 97년에는 1,400억원의 매출 실적을 냈다. 이 정도면 여수, 광양 사람들이 번 돈을 순천에서 다 쓴다는 말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원도심 황금백화점
순천의 대표 백화점은 앞서 언급했지만, 중앙동에 자리 잡고 있었던 황금백화점이었다. 이 백화점도 대단했던 것이 87년 전국 백화점 조사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백화점으로 알려졌다. 1975년 문을 열었던 황금백화점은 개점부터 80년대까지 중앙동의 번영을 이끌었다. 특이했던 것은 이 백화점이 단일 건물이 아니라 주변 건물을 추가 매입해 확장시켰기 때문에 그 내부가 서로 다른 건물 구조여서 층의 높낮이가 차이가 있었고, 그 면적만큼 점포의 수도 많아서 멋모르던 아이들은 길을 잃기도 했다. 네 개의 출입문이 있어서 사방에서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출입구 마다 활기가 넘쳤다.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숨바꼭질장소였고, 멋과 유행에 민감한 10대부터 20대, 30대 여성들로 시끌벅적했다. 전성기 때는 백화점 1층에 100개가 넘는 옷가게가 있었다고 하는데, 90년에 중앙지하상가(현 씨내몰)까지 문을 열었으니, 그야말로 90년 중앙동은 크고 작은 옷가게가 차고 넘쳤던 것이다. 유명 브랜드 가게를 중심으로 미용실과 금은방, 옛날식 다방과 신식 음악카페, 분식점과 다양한 주점으로 활기가 넘쳤던 것이다. 황금백화점 2층에 위치한 황금극장은 순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극장 중 하나였다. 국도극장에서부터 중앙극장, 코스모스, 명보, 피카디리, 시민다리를 건너 시민극장과 맘모스에 이르기까지 극장들이 모여 있어 중앙동 일대는 매일 사람으로 넘쳤다. 그러나 그 이름만큼이나 황금기를 누렸던 황금백화점은 90년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스폭발 사고로 멈추게 된다. 1990년 8월 일요일 오전, 황금백화점 2층 스낵상점의 가스통이 폭발했고, 그로인해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이 한 번의 사고로 황금백화점은 위기를 맞이한다. 노후 건물을 존속시키느냐, 신축하느냐를 두고 상인들과 순천시 간 의견이 대립했다. 결국 현재의 모습으로 신축해 새로 문을 열기는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 사이 조례동에 뉴코아백화점이 문을 열었고, 원도심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신도심에 지어진 아파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포스트90년대
나는 황금백화점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문을 닫게 되었는지, 원도심의 인구가 얼마나 신도심으로 빠져나갔는지, 신도심의 생겨남으로써 실제 원도심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2014년 도시재생사업이 원도심에서 시작되었을 때, 사업을 계획하면서, 또는 추진하면서 원도심-특히 중앙동의 공간 변화에 대해 보다 상세하고 냉철하게 분석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황금백화점 건물 하나만이라도 상징적으로 재생해 보자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도시를 생태계로 보고 원도심에 모여 살고 있는 다양한 종들이 어떻게 도시라는 서식지를 이루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속하고 있는지 등등을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개발의 논리에서가 아니라 생태계의 보전과 지속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지금의 원도심, 중앙동을 다시 기록하고 이야기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2020.12. 글_이명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