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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황홀 필름로케이션 매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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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무진과 황홀,
그리고 순천 아카이브를 위한 노트

“별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1964 무진기행으로부터

무진기행(霧津紀行)은 김승옥(金承鈺, 1941~ )의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되었고,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김승옥은 ‘4.19세대’, ‘60년대의 감수성’을 대표하는 작가로, 무진기행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배경인 '무진'이라는 곳이 전남 순천이라고 알려지면서 순천을 소개하는 대표 문학작품이 되었다. 

다만, 이 작품이 몇 편의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1967년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안개>가 순천만에서 촬영되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김승옥은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해방이 되자 가족이 광양에 잠시 머물다가 순천에 정착했다. 그는 순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10대 학창시절부터 문학소년으로 감수성과 상상력을 순천에서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탯자리는 아니지만 유년시절을 보냈고, 작가의 재능과 꿈을 키웠던 순천은 그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는 60학번으로 순천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5.16혁명’ 쿠데타가 일어나고 휴교령이 내려질 때면, 어쩔 수 없이 ‘고향’ 순천에 내려와 잠깐잠깐 머물다 다시 상경하기도 했다. 작가가 밝혔듯이, 무진기행의 공간과 어떤 이야기는 실제 순천의 공간과 순천에서 자신이 목격했던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소설 속 ‘나’인 ‘윤희중’이 묘사하는 ‘고향’ 무진과 작가 김승옥이 60년대 무렵 그가 느꼈을 ‘고향’ 순천은 단순히 가상의 공간에서의 탐닉이라기보다는 체험적 장소성을 가지고 있는 실제의 순천기행으로도 읽힌다.

 


무진과 순천

그렇다면 무진(霧津)은 어떻게 탄생된 것일까? 작품을 발표할 당시 제목은 ‘霧津紀行’이었다. 무진(霧津)은 서울 광진을 ‘광나루’로도 부르듯 ‘안개나루’로 풀 수 있다. 한자 지명에서 강을 건너는 나루터를 진(津)으로, 조수가 들고나는 갯가의 항구를 포(浦)로 구별하였다. 그렇다면 ‘무진’은 강가에 위치한 곳일까? 작가는 ‘무진’의 지리(위치)를 작품 속에 이렇게 풀어낸다.


“무진엔 명산물이...뭐 별로 없지요?”
“별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수심이 얕은 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작가는 무진에 대해 “얕은 바다를 몇 백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으로 순천의 지리를 정확하게 풀어내고 있다. 수심이 얕은 바다는 ‘순천만’과 ‘여자만’과 일치한다. 한가지, 작품에서는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했지만, 순천 남쪽으로 펼쳐진 ‘순천평야’는 오랫동안 전원도시 순천을 먹여 살린 평야였고, 순천 부자들의 경제적 토대였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이 절묘하게 ‘그럭저럭’ 살아온 것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다. 60년대 지방 도시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무진과 광진

‘안개도시’ 무진은 어떤 도시인가? 작품에 의하면 무진은 “물이 가득한 강물이 흐르고 잔디로 덮인 방죽이 시오리 밖의 바닷가까지 뻗어 나가 있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삥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작가는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야 말로 ‘무진의 명산물’이라고 했다.
순천은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형이다. 삼면의 여러 산에서 갈래로 흘러내린 물은 동천으로 모아져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 사는 도심을 가로지르고 조수가 교차되는 연안 습지를 거치면서 바다로 서서히 빠져 나간다. 무진의 안개는 아마도 “물이 가득한 강물”과 “시오리 밖의 바닷가”, “수심이 앝은 바다”의 영향일 것이 분명하다.

만약 무진을 갯가에 위치한 포구가 아니라 강가에 위치한 ‘나루터’라고 한다면, 그것은 물이 가득한 강-순천의 동천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볼 수 있다. 동천이 흐르는 구간 가운데 난봉산 서쪽에서 흘러내려온 옥천과 합수되는 ‘이수합’-죽도봉 아래 지점을 순천 고지도에서는 ‘동천’과 함께 ‘광탄(廣灘)’ 또는 ‘광진(廣津)’이라 표시하였다. 이 지명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광탄’이라는 지명으로 보아 두 하천이 합수되는 곳이어서 다른 구간에 비해 ‘물이 가득’했을 것이다. 따라서 하천의 폭도 지금보다 더 넓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천(강)을 건너는 곳. 나루터가 있어야 한다. 그곳을 ‘광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872년 순천 고지도에 ‘광진교’가 그려져 있다. 배로 건넜던 것을 언제부터인가 다리를 놓아 건넜다고 볼 수 있다. 이 다리가 지도에 표시된 것으로 보아 중요한 시설 또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중요한가? 

순천에서 광양과 여수를 가기 위해서는 동천을 건너야 한다. 그 건널목이 바로 ‘광진’이었다. 이 지점은 순천의 역사적 경관에서 매우 흥미로운 곳이다. 강 건너의 산을 ‘죽도봉(竹島峰)’라 부른 것도 이 곳의 강폭이 바다나 호수처럼 상당히 넓었기 때문에 ‘산’을 ‘섬’으로 이름 불렀던 것이다. 가까이 신선을 부른다는 뜻을 가진 ‘환선정’이라는 빼어난 정자가 있었는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 정자에 올라 소강남 순천의 풍경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광진’이라는 지명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렸다. ‘무진’을 통해 잊혀진 ‘광진’을 더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자료 이미지] 1872년 지방도, 순천도호부 부분, 지도 출처 : 서울대 규장각


광진과 동천


18세기 중엽,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東川舊名廣津有二源一出雞足...”이라 했다 즉 ‘광진’을 동천의 옛 이름이라 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에 쓰인 『신증동국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광탄(廣灘)은 근원이 둘 있으니 하나는 미초률령(未草栗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구현(鳩峴)에서 나와 원산(圓山) 북쪽에서 합하고, 부의 동쪽 1리에 이르러 옥천(玉川)과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용두포(龍頭浦)가 되었다. 옥천(玉川)은 성 남쪽 문 밖에 있으니 난봉산(鸞鳳山) 서쪽에서 나온다.”로 적고 있다. 여기에서 ‘광탄’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동천의 한자식 옛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광진은 광탄-동천을 건너 광양과 여수를 갈수 있는 나루로 ‘부의 동쪽 1리에 이르러 옥천과 합’해지는 위치의 나루터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승람』 보다 조금 앞선 기록, 16세기 초반에 순천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매계 조위가 남긴 『임청대기臨淸臺記』에서는 승평(순천의 옛 이름)에 동계(東溪)와 서계(西溪)가 있고 서계의 이름은 ‘옥천’이라고 밝히고 있다. 매계가 동계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는 동계, 동천으로 계속 불러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리하자면 고문헌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천의 이름은 동계→광탄→광천→동천 순으로 변해왔는데, 광진은 동천(광탄)의 나루터였을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순천을 예부터 자연경관이 수려한 ‘삼산이수’의 ‘소강남’으로 형상화할 때, 동천과 옥천을 이수(二水)라 하였다. 동천은 김승옥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잔디로 덮인 방죽이 시오리 밖의 바닷가까지 뻗어”나간다. 시오리 바다까지 연결되는 긴 방죽, 다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동천은 순천 시내를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는 하천으로 범람을 막기 위해 방죽(둑방, 제방)이 천을 따라 순천만 습지까지 길게 뻗어있다. 지금의 방죽은 1930년대 초 홍수 피해를 입은 후부터 제방공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62년 8월에 동외동 쪽 동천 제방이 무너지면서 인명과 가옥의 피해가 컸던 대홍수를 다시 겪기도 했다. 60년대까지 동천 제방의 모습은 지금처럼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지 않았고, 대분의 구간이 소설에서처럼 잔디로 덮인 방죽이었다. 70년대부터 순천지역개발추진위원회가 동천제방에 벚꽃나무와 수양버들을 심었다고 한다.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냇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물속에 비쳐있는 것을 보았다. 옛날 언젠가, 역시 이 다리를 밤중에 건너다니면서 나는 저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나무들을 저주했었다.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나무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나무가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모든 게 여전하군." 내가 말했다. "그럴까요?" 후배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무진기행 중에서)


이제, 모든 게 여전하지 않다. 50~60년 전만 해도 고향에 돌아온 누군가는 작가 김승옥 처럼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전하다”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90년대 중반 이후로 연향, 조례 지역에 대규모 신도심이 생겨난 이후로 순천은 분명 빠르게 변하고 있다.


[자료 이미지] 1960년대 순천 전경 사진, 동천과 옥천이 만나는 곳. 출처 : 순천시

 


기차의 도착, 전라선 동순천역


소설에서 주인공 윤희중(영화에서는 ‘윤기준’)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역에 도착한다. 영화 <황홀>에서는 동순천역에서 이 장면을 촬영했다. 기차가 동순천역에 정차하고 남궁원(윤기준 역)이 기차에 내려 기차역을 빠져나온다. 역 광장에서 (구두닦이) 아이들이 한 정신나간 여자를 놀려대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동순천역은 1936년 10월 전라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다. 이 역은 서울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순천의 중심역인 순천역에 도착하기 전 정차하는 작은 역으로 시내와 가까워 순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동천을 건너는 다리를 콘크리트로 새로 놓은 것도, 순천 사람들이 다리 이름을 ‘조곡교’보다는 ‘동순천다리’로 더 많이 불렀던 것도, 이 기차역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순천에 기차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30년 12월 광주(송정리)~여수간 철도가 개통되면서부터이다. 이 철도의 이름은 당시에는 경전서부선(경남~전남), 광여선(광주~여수), 송여선(송정리~여수) 등으로 표기했다. 일본에서 ‘철도왕’으로 불렸던 네즈가이치로(根津嘉一郞)가 1928년에 설립한 남조선철도주식회사(‘남철’)가 이 철도를 개설했는데, 1936년 3월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국유철도로 편입되었다. 남철은 철도개설 뿐만 아니라, 여수~시모노세끼 간 연락선을 연결하여 이른바 ‘남철연선’을 만들었고, 버스 운행까지 병행했을 뿐 아니라 각종 토목공사를 맡음으로써 이름처럼  남조선 전남에서 큰 이익을 챙겼다.
1936년 10월에는 익산(과거 ‘이리’)~순천이 순차적으로 연결되면서 전라선이 새로 개통된다. 광여선(경전선)과 전라선, 두 개의 철도가 교차하고 철도사무소가 설치된 순천은 교통의 요충지가 된다. 1967년에는 순천~광양~하동~진주 구간이 개통되면서 경상도와 전라도가 철도로 마침내 연결되었다. 1971년에는 호남고속도로(전주~광주~순천), 1973년에는 남해고속도로(순천~부산)가 개통되면서 70년대 들어 순천은 ‘교통의 도시’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갖게 된다. 이로써 순천은 전남동부권의 중심만이 아니라 한반도 남해안, 부산과 목포의 중간 지점으로 위로는 전주-대전-서울로 연결되는 남해안 교통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순천은 조선시대에도 전남동부권의 행정과 물류의 중심지로 사통팔달의 요충지였는데, 일제강점 1930년대부터 기차가 등장하면서 더욱 빠르게, 보다 많은 사람과 물자가 들고나게 된 것이다. 특히 70년대에 들어서는 그 이름만큼이나 ‘빠른’ 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타 지역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오는 만큼, 순천 사람들도 서울과 부산과 같은 대도시로, 일을 찾아, 출세를 위해, 꿈을 찾아 떠났던 것이다. 소설 속 윤희중이 일찍이 그랬다. 가끔 그가 고향 무진을 상상했듯이, 많은 출향인들이 고향 순천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서울과 연결되는 전라선 기차는, 부산과 연결된 경전선 기차는 그들에게 단순한 기차가 아니었을 것이다.


[자료 영상] 1967.03.04 대한뉴스 제 612호-전진의 메아리 : 경전선 구간개통

 


버스의 도착, 동방여객과 합동정류소


소설에서 <무진으로 가는 버스>는 기차로 도착한 광주에서 무진까지 주인공을 실어 나른다. 흙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 시골길을 버스가 덜컹거리며 달린다. 1967년 흑백 영화 <안개>에 등장하는 버스는 자동차 박물관에 있을 법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데, 일명 ‘캬브버스’로 알려져 있다. <안개> 속 버스의 행선지는 재미있게도 ‘여수 만성 무진 순천’이다. 이 노선으로 보자면 무진은 순천과 여수 만성리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반면 시간이 흘러 1974년 칼라 영화 <황홀>에서는 ‘동방여객’이라는 버스가 등장한다. 버스가 달리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동방여객은 어떤 버스였을까? 어떻게 운행되었을까?
지금도 순천에서 운행되는 버스 중에 ‘동방고속’이 있다. 동방고속과 동방여객을 연결 짓지 못하고 있던 중, 인터넷 검색과 1975년 발행된 순천승주향토지를 면밀히 살피면서 알게 되었다. 둘이 하나의 회사였던 것을.


동방고속은 전라남도의 시외버스 운송 업체다. 본사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으며, 고흥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외버스 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2005년부터 사명을 동방교통에서 동방고속으로 변경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


동방고속은 고흥에 본사를 둔 버스회사로 이전 이름이 ‘동방교통’이었다. ‘동방여객’은 동방교통 이전의 이름이다. 이 버스의 운행노선(2015년 기준) 가운데 순천출발 노선은 (1)순천~광양~동광양~광영(금호고속과 공동운행)과 (2)순천~광양~동광양~태인도(금호고속, 오동운수와 공동운행)라고 소개하고 있다. 순천에서 광양읍, 지금은 동광양, 광양제철소가 된 광영과 태인도를 종점으로 동방고속이 운행되고 있다는 정보는 영화 <황홀> 속에서 동방여객이 어디쯤을 달리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지금도 동방고속은 여전히 그 구간을 달리고 있을까?

1975년판 순천승주향토지는 순천의 버스운행 역사와 동방여객에 관해 비교적 많은 정보를 전하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버스가 순천에서 운행된 것은 1930년 12월 25일 순천~광주간 철도가 개통된 바로 그 후부터였다. 남조선흥업주식회사가 순천~광주간 철도를 사설로 부설하였는데, (남철이라 하였다) 남철회사에서 운행한 남철버스가 순천~광주, 여수~순천, 벌교 등을 운행하였다. 차고는 지금 동방여객 자리에 있었다. 전쟁말기에 1도1사의 정책에 따라 전남여객으로 통합되어 남철버스회사에서 지금 합동정류소 차고를 신축한 것이다. (향토지 164쪽)”


이 기록에 따르면 1930년 12월 광여선 개통과 함께 남철버스가 운행되었는데, 차고는 ‘동방여객 자리’라 하였다. 이것으로 미뤄 짐작해보면 해방 이후 남철버스(후에 ‘전남여객’으로 통합)를 동방여객이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동방여객의 차고는 대수정(현 중앙동)에 있었고, 인근 동외동에 합동정류소를 신축했다고 전하고 있다. 중앙동에 있었다는 동방여객 자리는 다행히도 60년대 순천 중앙동을 찍은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자료 사진] 1960년대 중반 순천 중앙동 모습. 동방여객 버스와 차고 건물의 간판이 보인다.


70년대 순천의 영업용 차량 보유 현황을 보면, 동방여객(대표자 한재기)은 순천에 42대, 고흥에 50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순천에서 가장 많은 차량을 보유한 시외버스 회사였다. 당시 시외버스 외에도 고속버스 정류소가 별도로 있었다. 1973년 호남과 남해고속도로가 전 구간이 개통되면서 순천에도 고속버스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자료 영상] 1973.11.17 대한뉴스 제 958호 : 호남, 남해 고속도로 개통


동방여객은 순천에서 광양 45회, 하동 9회, 여수 11회, 구례 16회를 운행하였다. 광양 운행 횟수가 가장 높은 것으로 볼 때, 순천과 광양(읍) 간 사람들의 왕래가 동방여객을 통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67년 이전까지 순천~광양 간 철도가 놓이지 않았기 때문에 버스 운송이 기차를 대체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찻길이 놓이지 않은 고흥에서 동방여객이 영업을 시작한 것도 같은 배경이라 생각된다.


[표1] 동방여객 및 합동정류소 운행(출처: 1975, 순천승주향토지, 168쪽)


‘무진으로 가는 버스’는 무진읍 정류소에 도착한다. 그곳은 동외동에 있었던 합동정류소였다. 합동정류소는 여러 버스 회사가 함께 사용했던 시외버스터미널과 같다. 1965년에 호남약도사가 발행한 순천시가지 지도에는 동외동 성동초등학교 인근에 순천합동정류소 말고도 순천합승정류소가 하나 더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일대에는 자동차 공업사도 많았다.
그야말로 성동초등학교 부근은 시외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것이다. 동문 밖, 동외동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말을 맡아 돌보는 ‘사마(司馬)’로 불렀고, 광양과 여수로 가기 위해 동천을 건너는 나루터 ‘광진’이 있었던 곳이다. 그야말로 순천의 교통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영역임을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무진을 떠나며


나는 무진기행과 함께 ‘광진’의 역사적 유래와 변천 과정을 비교하면서, 현재 그 이름은 사라졌지만(그러나 그 흔적은 남아있다) 이곳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광진 나루에 배를 하나 띄워야 할 판이다. 그리고 근대의 상징인 기차와 무진으로 가는 버스를 통해 6-70년대 순천의 교통사까지를 정리해 보았다. 무엇보다 나루터 이름 ‘광진’을 통해 그동안 동천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과, 무진을 바닷가 포구-순천만 습지에 위치한 대대 포구의 공간을 상상했던 그 시공간의 감각을 새롭게 재구성하려 했다.

소설에서 읍내의 시공간은 매우 중요한 장소들이다.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그런 (소)도시가 주는 흐릿했지만 잡히지 않았던 도시의 시공간에 대한 감각, ‘다리가 많고’, ‘물이 가득한’ 무진에서 실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이 던져주는 도시 순천에 대한 감각이 돋는다.
작가가 창조한 가상의 공간 ‘무진’이 저 멀리 존재할 수도 있는 그저 문학적 허구의 시공간이 아니라 현재 나의 일상의 공간 일부로 더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저 멀리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 순천의 시공간을 좀 더 선명하게 끌어당길 필요가 있다. 필름을 되감듯, 바닷가(순천만 습지)로부터 강(동천방죽)을 거슬러 읍내(순천 원도심)로 들어오도록 ‘무진기행’을 다르게 전개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번 무책임한 ‘나’ 자신을 용서하면서 무진을 떠났던 그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1974 황홀 필름로케이션 아카이브>는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낸 픽션과 소설과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논픽션이 뒤섞이면서, 무진기행과 순천기행이 뒤섞이면서, 60년대와 70년대 순천과 2020년 현재의 순천의 공간과 장소가 뒤섞이면서, 다시, 무진을 떠나고 순천에 도착하며, 다시, 순천을 떠나고 무진에 도착하기를 반복하는 돈키호테식 ‘출정’과 ‘기행’의 아카이브라고 정리하기로 하자.


우리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검은 풍경 속에서 냇물은 하얀 모습으로 뻗어 있었고 그 하얀 모습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밤엔 정말 멋있는 고장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내가 말했다.” 

(무진기행 중에서)

 


 

 


순천시청각아카이브2.0
Suncheon AudioVidual Archive


제작 : 돈키호테콜렉티브(예술공간돈키호테)
참여자 : 이명훈(총괄기획) 박혜강(책임연구) 변재규(확장연구)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라남도문화재단



본 온라인 콘텐츠는 온라인미디어 예술활동 지원 ‘아트 체인지업(Art Change UP)’ 사업에 선정된 예술콘텐츠입니다.